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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 1. 들어가며

1899년 11월 29일 한스 감퍼는 풋볼 클럽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를 설립했다. 11명의 선수와 열광적인 팬들이 함께하는 축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운동경기는 아니었다.
축구가, 그리고 클럽이 그동안 어떻게 발전해왔고 얼마나 중요한 종목으로 성장했는지 그는 절대로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FC 바르셀로나는 모든 영역에서 거대하게 성장해왔고, 여타 스포츠 클럽들보다 훨씬 커다란 발전을 성취해와서, 이제 ‘클럽 그 이상’이라는 클럽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전세계에 산재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바르싸는 단지 스포츠 클럽이 아닌 자아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의 바르싸는 스포츠 영역을 벗어나 사회, 정치, 문화의 일부다. 가장 힘든 시간들을 거치면서 바르싸는 카탈루니아와 카탈루니아 인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 때 형성된 상징들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클럽과 그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페인에서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바르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민주적인 클럽이다. 그리고 바르싸는 유니세프와의 스폰서쉽을 체결함으로써 전세계에 있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데에 신경을 기울이는 클럽으로 알려지게 된다.
한 세기동안, FC 바르셀로나는 영광과 시련의 나날들을 거쳐왔다. 그 중에는 성공의 시기가 있고, 덜 성공적이었던 시기도 있으며 극적인 승리의 순간도 최악의 패배를 끌어안은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어우러진 것이 지금 클럽의 개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클럽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들이 있다.

2. 기원 (1899-1922)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 2. 기원 (1899-1922)

빈테르투르(Winterthur)에서 1877년 11월 22일에 태어난 사업가 한스 감퍼(Hans Gamper)는 바르셀로나에서 축구 클럽을 시작해보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 1899년 10월 22일 그는 지역 스포츠 잡지에 선수를 모으는 광고를 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호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감퍼는 1898년에 사업상의 이유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의 광고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약 한 달 가량이 지난 1899년 11월 29일에 그는 힘나스 솔레에서 열린 클럽의 첫 번째 회의를 진행했다. 감퍼와 함께 역사적인 첫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은 괄테리 와일드(Gualteri Wild), 유이스 도쏘(Lluis d'Osso), 바르토메우 테라다스(Bartomeu Terradas), 오토 쿤츨(Otto Kunzle), 오토 마이어(Otto Maier), 엔리치 듀칼(Enric Ducal), 페레 카보트(Pere Cabot), 카를레스 푸홀(Carles Pujol), 호셉 요벳(Josep Llobet), 존 파슨스(John Parsons), 윌리엄 파슨스(William Parsons) 등이었다. 그 회의에서 클럽을 결성하기로 결정이 났고, 영국인인 괄테리 와일드는 초대 회장이 됨으로써 그는 선수로 뛰는 것에 더해서 행정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와일드는 다른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류 선수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초의 유니폼

클럽을 시작할 때부터 선수들은 파란색과 자홍색이 교차되는 것으로 유명한 블라우그라나를 입었다. 한 쪽은 파란색이 다른 한 쪽은 자홍색이 들어가고 소매쪽 부위부터는 다시 반대의 색이 교차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하얀 반바지를 입었다.

최초의 클럽 앰블럼

클럽의 역사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바르셀로나 시 당국의 위임을 받아서 도시의 문양을 그대로 사용했다. 1910년에 운영진은 클럽이 자신들의 앰블럼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고 최고의 도안을 찾기 위해 경합을 붙였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채택되었던 문양의 기본적인 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시합

클럽이 치른 최초의 경기 상대는 지금은 투로 공원으로 알려진 보나노바에 살던 영국인 이주자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바르샤 선수들도 멤버로 포함되어 있던 영국인 이주자 팀이 1-0으로 이겼다.

최초의 경기장

바르샤는 초기에 영구적으로 쓸 홈 경기장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결과 1900년에는 호텔 카사노바스에 있는 곳을 썼다. 1901년부터는 라 카레테라 도르타(la carretera d'Horta)를, 1905년부터는 엘 카레르 문타네르(el carrer Muntaner)를 썼고, 클럽이 최초로 소유하게 된 경기장은 카레르 인두스트리아(carrer Industria)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계단식 스탠드가 설치된 경기장이었다. 공식적으로 개장한 것은 1909년 3월 14일이었는데, 그 때는 이미 클럽이 타이틀을 모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코파 마카야를 우승한 1901-02 시즌, 카탈루니아 챔피언쉽은 1904-05 시즌과 1908-09 시즌에 거머쥐었다. 새로운 시설에서 타이틀 획득에 박차를 가한 클럽은 계속해서 우승컵을 쓸어 담았다. 1909-10, 1910-11, 1912-13, 1915-16, 1918-19 1919-20, 1920-21, 1921-22 시즌에 카탈루니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1909-10, 1911-12, 1912-13, 1919-20, 1921-22 시즌에는 스페인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클럽은 스포츠와 사회 각 분야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즐거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설립자, 호안 감퍼



1877년 11월 22일에 스위스 빈테르투르에서 태어난 한스 감퍼의 어린 시절은 스포츠가 항상 곁에 있었다. 그는 육상, 사이클, 축구 모두 열심히 했고, FC 취리히를 창단하기도 했다. 그는 20살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했고, 다른 이들과 스포츠를 통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바르싸를 설립하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인기를 유지하는 축구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01년에 훌륭한 선수이기도 했는데, 팀이 넣은 88골 중에 49골을 마무리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03년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했고, 1908년에는 처음으로 해체 위기를 겪었던 시기에 클럽을 지켜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회장에 취임했다. 호안 감퍼는 1925년까지 다섯 번 회장이 되었다. 감퍼 자신은 완전히 카탈루니아와 일체가 되었다. 카탈란으로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그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1925년 그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정권의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 독재자가 레알 마드리드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 감퍼는 다시금 사업상 좌절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결국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3. 레스 꼬르츠에서 누 캄프로 (1922-1957)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3. 레스 꼬르츠에서 누 캄프로 (1922-1957)

레스 꼬르츠(Les Corts) 스타디움은 1922년에 완공되었다. 이 경기장의 건설로 클럽은 10년간의 황금기(1919-1929)를 비롯하여 성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환상적인 시기는 30년대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 때 경기장은 파시스트 독재자인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해 폐쇄되었고, 내전 시기에는 병영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레스 꼬르츠 스타디움은 다시금 도약한 바르싸의 훌륭한 시기에도 함께 했는데, 그 때 바르싸는 다섯 개의 컵을 획득하였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회원수는 크게 증가해서, 1944년에 2만 명이었던 회원이 1950년에는 3만 명을 돌파했다. 1920년대의 사미티에르, 1950년대의 쿠발라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이 경기장을 빛내며 블라우그라나 역사의 면면을 아로새겼다.

영광스러운 시기의 개막 ― 엘 캄프 델스 꼬르츠

1919년부터 1929년까지의 10년간은 클럽의 황금기로 기억된다. 그 때 팀에는 사미티에르(Samitier), 알칸다라(Alcantara), 사모라(Zamora), 사기(Sagi), 삐에라(Piera), 산초(Sancho)와 같은 선수들이 기량을 뽐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고, 클럽은 이후에 특히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될 때의 원인이었던 카탈루니아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채택하였다.



1922년 5월 20일은 새로운 레스 꼬르츠가 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그 곳은 오래지않아 ‘축구계의 대성당’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레스 꼬르츠는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최초 수용인원의 두 배에 달하는 60,000명을 수용하도록 확장되었다. 1924년에 있었던 클럽 창립 25주년 기념행사―발렌시아의 화가 호셉 세그레예스(Josep Segrelles)가 포스터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한―에서 바르셀로나는 총 12,207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되었고, 전도유망한 클럽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갔다. 5년 뒤 1928-29 시즌에 바르싸는 처음으로 스페인 리그 타이틀을 따냈고 그것은 이 시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그 타이틀을 따내기 전까지 바르싸는 카탈루니아 챔피언쉽에서 1923-24, 1924-25, 1925-26, 1926-27, 1927-28 시즌까지 내리 우승컵을 손에 쥐었고, 스페인 챔피언쉽에서도 1924-25, 1925-26, 1927-28 시즌의 우승자였다. 마지막 승리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꺾었던 두 번의 승리를 재연하는 것이었다. 바르싸 키퍼인 프란츠 플라츠코(Franz Platko)의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때의 승리는 라파엘 알베르티가 시를 지어서 기리게 되었다.

어려운 시기

영광스러운 20년대 중반에 바르싸는 스포츠 이외의 문제로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다가올 시기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25년 6월 14일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의 독재정권이 한창이던 시절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은 카탈루니아 국가를 부르면서 스페인 국가가 나오자 야유를 보냈다. 정부는 그 보복으로 경기장을 6개월동안 폐쇄한다는 조치를 내렸고(나중에는 3개월로 줄어들었다) 감퍼에게 회장직을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5년 뒤인 1930년 7월 30일 클럽의 설립자가 죽었다. 비록 클럽은 여전히 벤톨라(Ventolra), 라이치(Raich), 에스꼴라(Escola)와 같은 돋보이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스포츠 외적인 정치적 탄압의 뒷그림자에 가려져서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바르싸는 세 가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재정적 위기, 사회적 위기, 그리고 성적. 회원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비록 팀은 카탈루니아 챔피언쉽에서 1929-30, 1930-31, 1931-32, 1934-34, 1935-36, 1937-38 시즌 내내 우승을 거두었지만 스페인 전국적인 단위의 대회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내전의 영향

내전이 발발한지 한 달 뒤에 바르싸 회장인 호셉 수뇰(Josep Sunol)은 과달라하라 근방에서 프랑코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행히도 팀 멤버들은 당시에 수익 마련을 위해 멕시코와 미국으로 투어를 떠난 상태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팀원들 중에 절반이 멕시코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38년 3월 16일에 파시스트들은 클럽의 소시오들이 모이는 클럽에 폭탄을 투하해서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몇 달 뒤 바르셀로나는 파시스트들에게 점령당했고, 카탈루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클럽은 회원이 3,486명까지 감소해서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1940년 3월에 프랑코 정권의 측근 인사인 엔릭 피녜이로(Enric Pineyro)가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클럽의 이름은 애초에 영국식으로 작명되었던 Futbol Club Barcelona에서 스페인식 작명법인 Club de Futbol Barcelona로 바뀌게 되었다(최종적으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것은 1973년이다). 그리고 문양에 포함되어 있던 카탈루니아 깃발의 상징인 네 개의 빨간 줄은 1949년 원래의 모양을 되찾기 전까지 두 개로 줄어들었다.

강등 위기에서 코파 라티나 우승(1949)까지

40년대는 클럽이 점진적으로 위기에서 회복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그들은 스페인 컵을 거머쥐었지만 리그는 거의 강등될 뻔했다. 그 다음 시즌은 마드리드와의 수치스러운 경기로도 기억되는데, 이 때 바르싸 선수들은 심판, 경찰로부터 협박을 받으며 경기를 했다. 피녜이로는 파시스트였지만, 당시 바르싸 선수들에게 가해졌던 행위들에 역겨움을 느끼고 클럽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45, 1947-48, 1948-49 시즌에 스페인 리그를 우승하고 1949년에 코파 라티나를 차지하면서 바르싸는 최종적으로 그들 뒤에 수년간 놓여있었던 위기에서 재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르싸는 1949년 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회원 수는 24,893명이었고, 그 때까지 21번의 카탈루니아 챔피언, 9번의 스페인 컵, 4번의 스페인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쿠발라와 다섯 개의 컵

라디슬라우 쿠발라(Radislau Kubala)가 1950년에 바르싸에 도착하면서 바르싸는 레스 꼬르츠 경기장으로는 감당이 안될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951년에서 1953년 사이 바르싸는 거머쥘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따냈다. 스페인 리그에서는 1951-52, 1952-53 시즌 모두를 우승했고, 스페인 컵에서는 1951, 1952, 1953년의 우승자가 되었다. 1951-52 시즌동안 팀은 다섯 개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스페인 리그, 스페인 컵, 라틴 컵, 에바 두아르테 컵, 마르틴 로씨 트로피. 바소라(Basora), 세자르(Cesar), 쿠발라, 모레노(Moreno), 만촌(Manchon)이 이끌었던 당시의 공격진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4. 누 캄프 완공에서 75주년까지 (1957-1974)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 4. 누 캄프 완공에서 75주년까지 (1957-1974)

바르싸는 누 캄프 스타디움(Camp Nou)의 건설과 함께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것은 건축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계획이었을 뿐만 아니라 누 캄프 건설에 들어간 재정 규모만 보더라도 비상한 야심의 발현이었다.
팀이 계속해서 강해졌기 때문에, 새로운 홈구장을 건설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구장과 함께했던 초기의 몇 년은 클럽 역사상 평범한 성적만을 냈던 시기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새로운 구장은 그저그런 성적을 지겹게 바라보는 목격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팬층은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바르싸가 사회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는 점차 중요해지고 있었기에 이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이 점은 1968년 나르시스 데 카레라스(Narcis de Carreras)가 회장으로 취임한 후에 좀더 분명해졌다. 그는 지금까지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면서 클럽의 슬로건이 된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 More than a club)'을 주창했다.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니아 지역에서 그동안 카탈루니아 분리 독립 지지파이자 프랑코 반대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이는 바르싸가 이전부터 지역 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왔으며, 문화계와의 접촉면을 더욱 넓히고 깊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네덜란드 슈퍼스타인 요한 크라이프(Johan Cruyff)를 영입한 이후 바르싸는 1973-74 시즌에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이때는 클럽의 창단 7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그 때는 바르싸 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얼싸안을 수 있었다. 비록 여전히 프랑코 정권에 의한 억압이 가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누 캄프가 무대가 되다



◎개장 당시 누 캄프의 모습 (www.fcbarcelonaonline.com)


1940년대 후반에 이르자 그간 꾸준히 확장 공사를 해왔음에도 레스 꼬르츠는 바르싸를 위해 충분히 큰 규모가 아니라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고 바르싸는 새로운 부지를 매입할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1953년부터 바르싸의 회장직을 맡았던 프란세스크 미로-산스(Francesc Miro-Sans)는 그 계획을 밀어붙였던 사람 중에 하나였고, 누 캄프는 결국 1957년 9월 24일에 완공되었다. 새로운 경기장은 49,000명의 기존 회원을 포함해서 90,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 경기장은 팀을 위한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당시에 바르싸는 1957년 몬주익에서 열렸던 스페인 컵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가져옴으로써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던 시기였다.

1958-59, 1959-60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1957-58, 1959-60 시즌에는 페어스 컵의 우승팀이 되었다. 이에는 전설적인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재능있는 선수들을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당시 팀에는 코시스(Kocsis), 치보르(Czibor), 에바리스토(Evaristo), 쿠발라, 에울로기오 마르티네스(Eulogio Martinez), 수아레스(Suarez), 비야베르데(Villaverde), 올리베야(Olivella), 헨사나(Gensana), 세하라(Segarra), 그라시아(Gracia), 베르헤스(Verges), 테하다(Tejada) 등이 함께 뛰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려한 스타들이 즐비한 진용으로도 60년대로 들어가자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61년 베른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의 패배는 실망스러운 시기의 개막과도 같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우울한 시기동안 바르싸가 따낸 중요 대회 타이틀은 1963년과 1968년의 스페인 컵과 1966년의 페어스 컵 정도다.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 More than a club)

그렇지만 설사 피치 위에서의 성공이 적고, 다음 성공까지의 간격은 갈수록 길어졌다고 하더라도 클럽의 회원수는 증가세를 멈추지 않았다. 바르싸를 매력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프랑코 정권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카탈루니아의 일부로서 갖고 있는 상징성이었고 날이 갈수록 그것은 바르싸를 점차 매력적인 팀으로 만들어갔다. 나르시스 데 카레라스는 1968년 1월 회장 당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김으로써 이 상징성을 강조했다. “바르싸는 클럽 그 이상입니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회장으로 있었던 아구스티 몬탈 이 코스타(Agusti Montal i Costa)은 이를 더욱 멀리까지 나아가게 했다. 프랑코 독재정권에 의해 억제되었던 시기였음에도 가장 극명하게 클럽의 카탈루니아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축구계의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여러 번 프랑코 정권의 체육부 관계기관들과 극단적인 대립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요한 크라이프의 도착

외국인 선수들의 영입은 1953년 디 스테파뇨(Di Stefano) 사건 이래로 스페인 축구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되었다. 1970년대에 바르싸는 임의적으로 규정을 조정하는 협회 당국의 결정 때문에 불편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스페인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외국인을 어떻게 볼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놓고 협회는 자의적으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꾸준히 외국인 영입 정책을 채택했던 바르싸는 마침내 크라이프를 영입하는 개가를 올렸고, 그는 1973년 10월 28일에 드디어 바르싸 선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선수는 곧 바르싸가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태풍이 눈이 되도록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밤은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거둔 5-0 승리일텐데, 렉사흐(Rexach), 아센시(Asensi), 크라이프(Cruyff), 소틸(Sotil), 마르셜(Marcial)로 구성된 바르싸의 5인조가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공격력은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크라이프는 축구사에 획을 그은 선수였고, 피치 안팎에서 그는 타고난 리더였으며, 언론의 관심을 끌만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75주년 기념식

1973-74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난 뒤에 거행되었던, 1974년 가을에 열린 75주년 기념식을 통해서 바르싸의 사회적 정체성은 돋보이게 되었다. 화가 호안 미로(Joan Miro)가 도안한 전위적인 포스터가 인상적이었던 기념식의 행사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르싸의 존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매우 집단적인 시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특히 이 행사들에 화가, 작가, 가수 등 여러 부문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함으로써 카탈루니아 사회의 역동적인 측면들을 만천하에 알리는 장이 되었다. 아울러 기념식장에서 산트 호르디 합창단(Sant Jordi Choir)이 녹음한 노래인 ‘Cant del Barca'는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 바르싸의 공식적인 클럽송으로 사랑받고 있다.

5. 75주년에서 유러피언 컵까지 (1974-1992)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 5. 75주년에서 유러피언 컵까지 (1974-1992)

75주년 기념식은 분명 클럽의 잠재적 영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바르싸가 카탈루니아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드러냈던 행사였지만, 그 당시에 시민들의 삶은 프랑코 독재정권의 제약이라는 정치적 조건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도래는 이 나라에서 단지 정치적 차원의 중대 변화만을 뜻하지 않았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그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가 도래하자 클럽들은 연방정부처럼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했고, 모든 클럽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나오는 지원과 지방정부 차원에서 분배되는 지원의 혜택을 골고루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바르싸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전환기 당시 회장이 아구스티 몬탈이었는데, 최초로 치러진 민주적인 선거에서 호셉 유이스 누녜스(Josep Lluis Nunez)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클럽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회장직을 수행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축구는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외국인 선수의 영입은 더욱 확대되었고, 재정적인 측면에서 스포츠는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 시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부정기 수입”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주요한 케이블 방송사가 중계권을 따내면서 생기는 수익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바르싸는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바르싸가 전에 따냈던 리그 타이틀 이후로 새로이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렸다. 그렇지만 타이틀 중에서도 가장 목이 말랐던 것은 바로 유러피언 컵이었다. ‘드림 팀’의 등장으로 드디어 리그 4연패의 위업 속에서 유러피언 컵도 들어올리게 되었다.

1978년 선거

민주화로의 전환 이후로도 자유로운 선거가 벌어지지 않았던 몇 년의 시간이 지났던 때인 1978년 5월 회원들은 그들의 회장을 자기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 후보는 세 명이었다. 호셉 유이스 누녜스 후보는 10,352표를 얻었고, 페란 아리뇨(Ferran Arino) 후보는 9,537표, 니콜라우 카사우스(Nicolau Casaus) 후보는 6,202표를 얻었다. 이 때 당선된 누녜스는 2000년까지 회장직을 계속 맡게 된다.

바젤로 몰려간 바르싸 팬들



1979년은 바르싸에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들은 바젤에서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단지 승리만이 그 날의 기억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 유럽이 보는 가운데 거의 30,000명에 달하는 팬들이 경기장에서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니아의 색을 카드섹션으로 구현했다.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카탈루니아 도시들의 거리에서는 전례 없는 축하행사가 벌어지느라 난리였다. 바르싸는 1982년과 1989년 컵 위너스 컵을 다시 들어올렸다.

멈추지 않는 성장세

바르싸는 언제나 성장세가 멈추지 않았다. 1974년에는 66,000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는데, 1978년이 되자 77,000명으로 증가했다. 1992년이 되면 이 숫자는 98,000명으로 늘어났고, 1986년의 한 시기에는 108,000명으로 집계된 적도 있었다. 서포터들의 모임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1979년에는 96개의 서포터 클럽이 있었는데, 1993년에는 이 숫자가 대략 700개 가량으로 집계된다. 누 캄프는 1982년 월드컵을 맞아 다시 확장공사를 시행했고, 같은 해에는 미니에스타디(Miniestadi)가 건립되었다.

사랑해요, 우루티

1984-85 시즌 동안 바르싸가 리그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충분히 도망가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4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리그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바야돌리드를 잡아야했다. 그 경기는 골키퍼 우루티가 경기 막판에 페널티 킥을 막아냄으로써 중요한 승점을 얻어왔고, 그를 통해 산술적으로 우승을 확정짓게 되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포착해냈던 사람은 라디오 중계를 하던 호아킨 M 푸얄이었다. 그는 “우루티, 사랑해요(Urruti, I love you)”라는 유명한 절규를 방송으로 내보냈고, 이것은 지금까지 클럽의 전설이 되어 있다. 그 해의 선수단을 보면 여러 위대한 선수가 함께 뛰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줄리오 알베르토(Julio Alberto), 미구엘리(Migueli), 아르키발트(Archibald), 슈스터(Schuster), 그리고 주장 알렉산코(Alexanco)가 있다.

‘드림 팀’ 시절 (1990-1994)

1985년 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뒤에 1986년 세비야에서 열렸던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패하자 실망이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오래지않아 찾아왔는데, 불명예스러운 선수들이 보드진의 사임을 요구했던 에스페리아 항명(Hesperia Mutiny)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회장은 요한 크라이프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축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철학을 갖고 접근했으며, 선수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지시하면서 선수단 개편 작업에도 빠르게 착수했다. 그가 만든 것은 새롭게 승리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는 팀이었고, 후세 사람들이 ‘드림 팀(Drea, Team)’으로 기억하게 될 바로 그 팀이었다. 이 전설적인 팀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리그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물론, 클럽이 그토록 원했던 첫 번째 유로피언 컵을 들었다.

1992년 5월 20일: 잊을 수 없는 그 날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첫 번째로 유로피언 컵을 들어올렸던 1992년 5월 20일의 밤은 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상대팀은 제노바에서 온 삼프도리아였고, 바르싸는 연장전에 터진 로날드 쿠만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로 1-0 승리를 거머쥐었다. 클럽 역사상 최초로 유로피언 컵을 들어올렸던 팀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 수비사레타(Zubizarreta), 난도(Nando), 페레르(Ferrer), 쿠만(Koeman), 주앙 카를로스(Juan), 바케로(Bakero), 살리네스(Salines) [교체:고이코이체아(Goikoetxea)], 스토이치코프(Stoitchkov), 라우드럽(Laudrup), 과르디올라(Guardiola) [교체:알렉산코(Alexanco)], 에우세비오(Eusebio).

6. 웸블리에서 로마까지 (1992 - 2009)

FC 바르셀로나의 역사 ― 6. 웸블리에서 로마까지 (1992 - 2009)

드림 팀은 다른 이들이 흉내내기도 어려운 길을 닦아놓았지만, 1994년 유러피언 컵 대회 결승전에서 패배함으로써, 한 시기의 종언을 고했다.

요한 크라이프는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리던 1996년에 클럽을 떠났고,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서 처음 거둔 결실은 1997년 또 다시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한 것과 동시에 코파 델 레이도 거머쥔 것이다. 그 다음 시즌에서 바르싸는 리그와 스페인 컵, 유럽 슈퍼 컵을 들어올렸다.

피치 위에서의 성과물에도 불구하고 크라이프가 팀을 떠남으로써 회원들 사이에서는 클럽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드러나지 않은 깊은 곳에서 모종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어떻게 해야 축구로 돈을 벌고 클럽이 발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커다란 스폰서 계약의 체결 문제, 중계권과 초상권 문제, 선수들과의 계약에서 해지조항을 삽입하는 문제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빅 클럽들을 운영하는 데에는 점점 더 복잡한 과정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바르싸는 바르셀로나 정신의 발현이라는 테마로 100주년을 기념했다. 그렇지만 팬들 사이에는 여전히 분열이 존재했고, 끝내는 누녜스 회장의 시기가 끝나게 되었다. 2003년에 호안 라포르타가 당선되기 전까지 호안 가스파르트는 얼마간 회장직을 맡게 된다.

의문이 남는 성과물들

바비 롭슨과 루이스 반 할이 감독으로 있었던 시절에도 바르싸는 꽤 좋은 결과를 냈다. 특히 1996-97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고 그 다음 시즌부터는 리그를 2연패하는 성과를 냈다. 그렇지만 그러던 순간에도 한 시기의 종말이라는 느낌이 가셨던 것은 아니었고, 회원들 사이의 동요는 점차 커져갔다. 1999-2000시즌의 실망스러운 결과는 결국 누녜스 회장에게 물러날 시기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100주년 기념행사들

많은 조직들이 100주년을 누릴 수 있지는 못한 법이다. 100주년은 오로지 지속성과 연속성의 결과물이다. 바르싸의 100주년 행사들은 1998년 11월부터 시작되었고, 그 때부터 한 해 동안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벤트와 일정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화가인 안토니 타삐에스(Antoni Tapies)는 공식 포스터를 도안했고, 음악가 호안 마누엘 세라트(Joan Manuel Serrat)는 누 캄프 피치 한가운데에서 ‘Cant del Barca'를 불렀다. 100주년은 영광스러운 과거와 희망과 수많은 기대로 가득한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다. 역사적인 100주년이 되던 해에 바르싸는 축구, 농구, 핸드볼, 롤러 하키 종목에서 리그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공백기

누녜스의 사임 이후 선거는 2000년에 실시되었고, 그 결과 22년간 부회장이었던 호안 가스파르트가 신임 회장에 당선되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자는 유이스 바싸트였다. 그렇지만 가스파르트 회장 재임 기간에 스포츠 팀으로서 성공을 거두는 데에 실패했고, 클럽은 더욱 더 깊은 위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가스파르트는 2003년 2월에 사임했고, 바르싸는 6월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채 남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위기 의식으로 가득찬 가운데에서도 농구팀은 2003년 5월 초대 유로리그를 정복함으로써 바르싸는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라포르타 회장 취임

2003년 6월 15일 새로운 회장 선거가 실시되었고, 젊은 변호사인 호안 라포르타는 유이스 바싸트를 앞선 채 선거를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은 밝은 새 시기의 신호탄이었다. 새로운 방향을 약속하고 클럽에 다시금 낙관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냈으며 특히 호나우지뉴, 데코, 에투 등의 세계적인 스타들을 영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팀은 새로운 타이틀을 거머쥐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출발은 2004-05 시즌의 리그 우승이었다. 그 성공은 다음해에도 이어졌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최고의 순간을 꼽자면 클럽이 두 번째로 거머쥔 유러피언 컵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르싸는 ‘클럽 그 이상’의 슬로건이 갖고 있는 가치를 보다 확장시켜서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보다 증진시키고 현대적 가치에 맞도록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위대한 도전’ 프로젝트가 꾸준히 실현된 결과 2006년 현재 회원은 역대 최고인 150,000명까지 증가했다.

2006년, 꿈의 한 해

2006년은 바르싸의 역사상 가장 기억할 가치가 있는 한 해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바르싸는 파리에서 열린 아스날과의 결승전을 2-1 승리로 장식하며 두 번째로 유로피언 컵을 차지했다. 이 해에 산트 호안 데스피에서 호안 감퍼 스포츠 센터도 개장했고, 같은 해 9월, UN 뉴욕 본부에서는 바르싸와 유니세프 사이에 역사적인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바르싸 정신의 가장 헌신적인 단면을 그리고 있을 뿐더러 ‘클럽 그 이상’이라는 팀의 슬로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09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한 해

2008-09시즌, 호셉 과르디올라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팀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또한 팀은 스페니쉬 리그와 컵, 챔피언스리그, 유러피안 슈퍼컵과 스페니쉬 슈퍼컵, 클럽 월드컵을 모두 우승하며 클럽 역사에 길이남을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게 된다. 권위와, 전세계적인 존경을 가져온 6관왕이라는 업적에는 라 마시아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활약이 핵심이었다 ; 메시, 이니에스타, 싸비, 페드로 같은. 베르나베우에서의 6:2 승리, 로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거둔 승리, 아부다비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에스뚜디안떼를 상대로 거든 승리 등은 팬들 사이에 길이 회자될 만한 경기였다. 스포츠적인 성공은 클럽의 대외적 활동에도 큰 영향을 주어, 2009년 11월에 쏘시오의 숫자는 172,938명에 이르렀다. 과르디올라의 두번째 도전이었던 2009-10시즌, 클럽 역사상 20번째로 리가 2연패를 이뤄냈고, 승점 99점의 새로운 기록을 작성했다. 타이틀은 마지막 날까지 확정되지 않았었고, 마지막 라운드 바야돌리드 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뒤 같은 날 밤 축하 파티가 깜누에서 열렸다.


◎2008/09 European Champions League Final Winner ─ FC Barcelona